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 (문단 편집) === 응우옌 흐우 짜잉 === [[파일:external/www2.vietbao.vn/65117184-small_129138.jpg]]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의 창설자인 응우옌 흐우 짜잉(Nguyễn Hữu Chánh)은 1952년 [[베트남국]] 빙딩성에서 태어났다. 베트남 공산화 이전에는 건축회사를 운영했다. 베트남의 공산화 이후 특공대를 조직하여 [[반공]] 활동을 하다가 1982년 미국으로 탈출하여 캘리포니아에 정착하였고 사업하여 다시 번창하였다. 그리고 상기한 바와 같이 미국에서 자유 베트남 임시 정부를 결성했다. 2006년 사업차 방한했다가 4월 4일에 [[한국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는 굴욕을 겪었다. 사유는 베트남 정부와 체결된 범죄자 인도 협약과 그에 따른 베트남 정부의 요청이었다. 법무부는 이 사실을 열흘 후인 4월 14일에 확인하였고 짜잉이 베트남 국적을 유지 중이었기 때문에 인도조약에 따라 베트남에 보낼 계획이었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남베트남 출신 망명자들을 중심으로 베트남 정부의 테러 배후설은 사실이 아니며 응우옌 흐우 짜잉은 [[김구]], [[김규식]]과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대대적인 석방 운동이 벌어졌다. 그런데 방한한 이유가 베트남 정부에서 보낸 공작원의 미인계에 속아서 넘어간 것이란 말이 있다.[[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182|기사]] 그러나 [[서울고등법원]]에서는 응우옌 흐우 짜잉이 저지른 범죄는 대부분 공모 단계에서 발각되거나 혐의가 있다고 의심될 뿐 직접적으로 연관된 증거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정치범]]으로밖에 안 보인다는 이유로 인도를 거절하고 2006년 7월 27일 그를 석방하였다. [[범죄인 인도조약]]에 의거해 정치범은 인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짜잉은 "나는 한국 사법부의 정당한 판결을 믿었고 그것은 현실이었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살아있는 나라다."라고 감사를 표했으며 수 일 후 한국에서 출국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81/0002435126|기사]] 베트남은 응우옌 흐우 짜잉의 재판기간 내내 공안당국 책임자를 직접 [[서울특별시|서울]]에 파견해 꼬박꼬박 법정 증인으로 출석시킬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또 어떻게서든 베트남 본토로 끌고 오려고 [[쩐 득 르엉]] 당시 주석이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친서까지 전달해 가며 거의 읍소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 거부 판결이 나자 베트남 정부는 유감을 표했으며 짜잉을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과 공조하여 잡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이로 인해 베트남과의 사이가 껄끄러워졌지만 8월에 [[이택순]] 당시 경찰청장이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곧 풀어졌다. 이 사람은 당시 한국 언론에서 '우엔 후 창'으로 불리는 일이 [[https://mnews.sbs.co.kr/news/endPage.do?newsId=N1000150030|잦았으니]] 당시의 기사들을 찾아보고 싶으면 우엔 후 창이라고 검색하는 게 좋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